2015년 4월 29일 수요일

하나님의교회에서 만나는 어머니 하나님

성경은 생명수의 근원 어머니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하나님에대해 들어보셨나요?
안상홍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는 어머니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우리영혼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영혼의 생명수는 어머니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안상홍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에서 어머니 하나님을 만나보아요~~





생명수를 받으라


물은 생명체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체는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물의 1~2%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며 12%가 부족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물을 두고 생명 그 자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우리 영혼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영혼의 생명인 영생도 생명수가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가 없다면 우리 영혼도 심한 갈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생명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아모스 8:11~13)


우리 영혼에 필요한 생명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진리인 생명수를 구하지만 얻을 수 없어 영혼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예언하고 있다. 과연 생명수는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생명수를 주시는 주체가 누구인지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요한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밧모섬이라는 곳에서 계시를 받았다. 천사가 모여준 미래에 대한 일들 속에서 그는 성령과 신부가 생명수를 받으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성령과 신부는 누구일까. 성령은 성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다. 생명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에 이 시대 성령께서 오셔서 생명수를 주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1:7~8)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 옆에서 함께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는 어떤 존재일까. 생명수를 베푸시는 주체를 알지 못하고서는 생명수를 받을 수 없기에 ‘신부’에 대한 문제만큼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도 요한도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요한은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이는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낡은 성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인 예루살렘은 누구인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그렇다. 생명수를 주시는 성령과 신부는 곧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시다. 성령 혼자만이 아닌 성령과 신부께서 함께 생명수를 주신다는 것은 이 시대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수를 받기 위해 하늘 아버지와 더불어 하늘 어머니를 믿어야 함을 뜻한다. 이와 함께 구약시대 많은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인 하늘 어머니께서 생명수를 주실 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스가랴 14:8)


실지로 어떤 건물에서 물이 솟아난다면 큰 문제다. 아마도 기초공사부터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스가랴 선지자는 생명수가 예루살렘성에서 솟아나 동서로 흐를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다. 이는 실지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생명수가 사시사철 쉼없이 흘러 넘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수는 더욱 그 양이 많아져 동서뿐 아니라 전 세계로 흐를 것을 에스겔 선지자도 예언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에스겔 47:1~5)


처음에는 발목에 오르던 생명수가 멀리 흘러갈수록 무릎, 허리까지 차 올라 나중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이는 생명수인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작게 시작됐지만 마침내는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점점 더 왕성하게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 시발점이 바로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생명수라야 전 세계로 흘러간다. 세상의 다른 유명한 신학자나 성경 연구가가 아닌 오직 하늘 어머니라야 가능한 예언이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 47:12)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로부터 흘러 넘친 생명수는 결국 강이 되고 그 강 좌우에는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잎사귀는 약재료가 된다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은 시대를 뛰어넘어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진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1~5)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생명수가 솟아난다고 예언한 반면,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예언도 성령의 신부 되신 하늘 어머니께서 생명수를 주신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어린양의 보좌’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예레미야 3:17)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좌, 즉 어린양의 보좌가 예루살렘이라고 증거했다.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이 기록한 ‘어린양의 보좌’는 ‘하늘 어머니’를 뜻하는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는 생명강이 예루살렘에서 흘러 넘치는 모습은,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강이 흘러나오는 것을 기록한 요한의 계시와 같다.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생명수는 오직 어머니 하나님을 통해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받은 자들만이 하늘나라에서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모습을 보았다. 누구라도 생명수를 받지 못한다면 영생도, 구원도, 천국도, 천국의 영광과 축복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심한 갈증을 느끼는 이 시대 하늘 어머니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말씀하고 계신다.

“오라! 누구든지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

2015년 4월 27일 월요일

마지막 아담은 바로 안상홍님 이시랍니다~~


안상홍님께서는 성경의 예언을 따라 이땅에 등장하신 재림 예수님이십니다.
안상홍님께서는 하나님의교회를 설립해 주시고 진리를 찾아 주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가운데 오늘은 마지막 아담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누구인가?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영혼을 그 속에 넣자 비로소 아담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탄생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이렇게 창조된 아담은 그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했다. 후에 아담은 930세라는 나이로 죽기까지 가인과 아벨 등 많은 자녀를 낳았다고 구약성경 창세기는 전하고 있다. 이것이 아담의 일생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아담을 두고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창조된 아담은 분명 한 사람인데 성경에서는 첫 사람 아담이 있고 마지막 아담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씀 가운데 두 아담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며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다. 첫 사람 아담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하나님께서 흙으로 육체를 만들어 그 속에 영혼을 불어 넣어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탄생시킨 아담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담은 누구인가. 마지막 아담에 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살려주는 영’이라는 점이다. 이로 보건대 마지막 아담은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주기 위해 오시는 구원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14)


아담을 오실 자에 대한 표상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실 자’는 성경 맨 마지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오실 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 즉 재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오실 자’를 표상하는 아담은 바로 재림 예수님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아담 또한 마지막에 등장하시는 재림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살려주는 영’으로 오시는 마지막 아담인 재림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인류를 살려주실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4)


마지막 아담인 재림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다. 과연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떻게 먹고 마신단 말인가.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마태복음 26:17~19)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떡을 당신의 살로, 유월절의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살려주는 영’인 마지막 아담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다.


마지막 아담의 예언 그대로 유월절을 가지고 오신 재림 예수님은 과연 누구일까.


출처 : www.pasteve.com 패스티브닷컴



마지막 아담은 바로 안상홍님이십니다.
안상홍님은 유월절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오직 새언약 유월절은 안상홍님께서 세워주신 하나님의교회만 지키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도 안상홍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 


2015년 4월 24일 금요일

우리는 어머니 품에 살아갑니다




해외에 살때 많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다들 집을 떠나 고생들이 많았지요

모두에게 공통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바로 어머니 였습니다.

집을 떠나 세계를 여행하는 모두가 겪는 그 마음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그 마음입니다


2015년 4월 23일 목요일

안상홍님께서 세워주신 하나님의교회 에서 배우는 법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잘 모르신다면 안상홍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한번 조금 자세히 볼까요?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법이 정확히 있고 지켜집니다.
오늘은 페스티브에서 나오는 법 적용의 원칙이라는 글을 함께 볼까 합니다.

그리고 

왜 안상홍님께서 중요하신지 하나님의교회가 중요한지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법 적용의 원칙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상호 간의 약속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약속은 수많은 법규들로써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 간에 생활관계가 복잡해짐에 따라 분쟁도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분쟁을 조정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규 또한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수많은 법규가 생겨남에 따라 이에 따른 조정사항 또한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떠한 법규를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하는지, 상호 충돌되는 경우에는 어떤 법규를 먼저 해석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일정한 순서와 법칙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법을 적용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다. 법에는 일정한 단계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는 근본법으로 헌법이 존재하고, 헌법 아래 법률, 명령, 조례, 규칙 순이다. 이렇듯 하위법의 내용은 상위법의 내용에 위반될 수 없다는 원칙이 바로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다.

최근 형법 제241조에서 처벌 규정을 두고 있던 간통죄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을 통해 폐지되었다. 법률은 헌법의 아래 단계이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내려진 이상,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영적으로도 잘 맞아 떨어진다. 마치 그림자와 실체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약속하신 구원을 받고 마침내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법 적용의 원칙이 어떻게 반영될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영적 상위법, 즉 최고단계의 법은 오직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율법이다. 성경을 통해 제정해주신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아래 단계의 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구원의 약속이 있을 수 없다. 예배일을 예로 들자면, ‘안식일’이 상위법인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 20:8)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16)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가복음 16:9)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법을 주셨고, 예수님께서 친히 본보여 지키셨으며, 그 안식일은 부활하신 일요일 전날인 토요일임을 성경으로 증거해주셨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예배일을 일요일로 정해놓고 지키고 있다. 이것은 상위법 위반이다. 사람이 만든 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법 위에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일요일 예배를 어떻게 재판하실까? 틀림없이 위법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효력이 없으면 지킨다 한들 구원의 약속도 없다.

두 번째 원칙은 ‘특별법 우선의 원칙’이다. 특별법은 특수한 상황이나 특정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을 말한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인 일반법은 모든 사항과 사람에게 적용되어 영향을 미친다. 특별법은 특수한 사항을 규율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이기 때문에, 해당되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일반법보다 우선시된다. 예를 들어, 민법에 대한 특별법으로는 상법이나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있고, 형법에 대한 특별법으로는 특정범죄가중처벌에 관한 법률 등이 있다. 성경에도 이런 특별법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8)

성경을 통해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속 곧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알려주신 것이 바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법이라고 한다면, 특별하게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도 구원을 약속받은 자도 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39~4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렸던 두 행악자 중 한 사람에게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자는 그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 왔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는 왜 낙원을 약속받게 되었을까? 바로 특별법이 적용된 것이다. 곧 죽을 목숨인 그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기회가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죽기 직전,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다. 특별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특별법을 적용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곧 특별법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신법 우선의 원칙’이다. 법률이 개정된 후에는 이전에 적용되던 구법은 잊어야 한다. 반드시 새로 개정된 신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다만 이 원칙이 요구하는 것은 신법과 구법이 동일한 형태의 법률일 경우다. 이 원칙이 타당한 이유는 신법이 구법보다 현실에 좀 더 부합하고, 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입법자가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경했다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법에도 구법과 신법이 있다. 즉 구법이 신법으로 개정된 것인데, 이제는 하나님의 신법을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히브리서 8:7~8)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8:13)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17)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20)

첫 언약은 구약시대에 주신 모세의 율법이고, 새 언약은 신약시대에 주신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희생제물이 되셔서 새 언약인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완전케 해주셨다. 많은 교회들은 “율법은 폐지되었다”며 하나님의교회를 가리켜 율법을 지키는 교회로 매도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개정된 것이다. 부족한 우리가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신법인 새 언약,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완전하게 바꿔주신 것이다. 즉, 신약시대 이후로는 신법인 새 언약을 우선으로 적용해서 지켜야 하나님의 약속인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법률 불소급의 원칙’이 있다. 이것은 행위 당시의 법률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행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법률이 이후에 제정되었다고 해서 이전의 행위에 대해 소급하여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사야 43: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1~12)

하나님의 법에도 이 원칙이 적용된다. 시대에 따라 구원자의 이름이 바뀌었다. 성부시대에는 구원자의 이름이 여호와였다. 그런데 성자시대에는 예수님으로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니 구원자의 이름도 바뀐 것이다. 그렇다고 성부시대 여호와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었던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 성자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신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더 이상 여호와가 아닌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성령시대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요한계시록 2:17)

이제는 예수님이 아닌 성령시대의 구원자인 예수님의 새 이름을 불러야 한다. 물론, 성자시대에 살았던 자들이 성령시대 구원자의 이름인 예수님의 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성령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새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새 이름은 받는 자만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성령시대 구원자로 임하신 새 이름을 알고 영접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혹여 사람들이 만든 법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의 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난한 자든 부자든, 명예와 권력이 있든 없든, 지혜와 지식이 많든 적든, 누구나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만인에게 열려 있다.

<참고자료>
1. ‘법적용의 원칙’, 네이버 지식백과
2. ‘62년 만에 간통죄 폐지...헌재 '위헌' 결정...부부 性생활에 국가 개입 'NO'’, 매일경제, 2015. 3. 2.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196676


출처 : www.pasteve.com 패스티브닷컴


2015년 4월 13일 월요일

2015년 4월 12일 일요일

안상홍님께서 찾아주신 유월절을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저는 참 떡을 좋아합니다
성경에 중요한 떡이 나오는걸 아시려나 모르겠네요
성경에 있는 떡은 정말 정말 중요한 떡입니다.

안상홍님께서는 유월절을 찾아 주셨습니다.
안상홍님께서 찾아주신 새언약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교회 뿐입니다.
얼마전에도 하나님의교회는 유월절을 지켰지요

그럼 안상홍님께서 찾아주신 유월절을 지켜서 축복을 받아야 겠습니다








떡과 유월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크고 작은 행사에 여러 가지 다양한 떡을 상에 올렸다. 명절이나 생일에도 빠지지 않는 음식 중 하나가 떡이다. 떡의 어원은 동사 ‘찌다’가 명사가 되어 찌기→떼기→떠기→떡으로 변화된 것으로, 본디는 ‘찐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떡은 반죽과 만드는 방법에 따라 그 이름이 참으로 많다. 쌀가루를 찐 것은 이(餌)라 하고, 쌀을 쪄서 치는 것은 자(瓷)라 하며, 기름에 지진 것은 유병(油餠)이라 한다. 또 꿀에 반죽한 것은 당궤(餹鐀)라 하고, 가루를 반죽하여서 국에 넣고 삶는 것은 박탁(餺飥)이라 하며, 찰가루를 쪄서 둥글게 만들어 가운데에 소를 넣은 것을 혼돈(餛飩)이라 한다.


선조들은 계절마다, 절기마다 풍년, 무병장수, 액막이 등의 의미를 부여한 특색 있는 떡을 해먹으며 1년을 지냈다. 봄에는 진달래꽃 등 꽃잎을 따 곁들인 화전이나 취떡을, 여름에는 술을 넣어 발효시켜 만든 증편을, 가을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어 주민들과 나눠 먹었고, 겨울에는 떡 옹심이를 넣은 팥죽과 흰 가래떡을 뽑아 떡국을 끓여 먹었다. 설날 아침에 흰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1년 동안 때묻지 않고 밝고 좋은 일만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고, 떡을 엽전 모양으로 둥글납작하게 써는 것은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고 한다.


떡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먹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는 상류층의 별식이나 세시풍속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하나의 간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관혼상제 의례와 각종 연회의 필수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성경에도 특별한 날에 먹는, 특별한 떡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떡은 누룩을 넣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가 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린도전서 5:7~8)


사도 바울은 누룩 없는 떡으로 유월절을 지키자고 강조했다. 유월절 양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자는 뜻이었다. 이천 년 전 인류를 살리시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바로 전날이 유월절이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6:17~26)


유월절에 최후의 만찬을 하기 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예수님의 살을 의미하는 유월절 떡을 먹음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1~54)

<참고자료>
네이버캐스트,서울 떡박물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2&contents_id=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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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0일 금요일

해마라고 합니다 해마 귀여워요


수족관 가서 찍었어요 해마라는데 참 귀여워요 ㅋㅋ
집에서 키우고 싶네요 ㅋㅋ


2015년 4월 9일 목요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신 안상홍님




안상홍님께서는 우리를 찾아 찬란한 하늘의 영광을 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안상홍님께서는 하나님의교회를 세워주시고
잃어버린 자녀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교회에서 알게된 아버지 안상홍님의 사랑
그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고 크신 사랑의 결정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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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작은 단추에서부터 주머니 속 동전 몇 개, 신분증, 휴대전화, 지갑까지, 일상 속에서 우리는 늘 크고 작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때로는 단순한 사물이 아닌 반려동물이나 가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잃어버린 대상으로 인해 느끼는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놀이동산에서 어린 자녀를 잃어버린 엄마의 슬픔은 휴대폰이나 지갑을 잃어버린 슬픔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그만큼 슬픈 일인 것이다.


모든 잃어버린 것들은 제각각의 사연이 있고, 잃어버리게 된 계기가 있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분실했을 때에도, 그것이 주인의 손을 떠나게 된 데는 어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아무 이유 없이 주머니 속의 동전이 마술처럼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경우라면 얼마나 절절하고 가슴 아픈 이유와 사연들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거리의 실종 전단지를 무심코 스쳐 지나간다. 나와는 관계없는 타인들의 이야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하늘에서 ‘잃어버린’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근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잃어버린 자는 곧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살던 존재, 즉 천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천사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셨고, 우리는 어떻게 이 땅으로 오게 된 것일까.


내(예수님)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13)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늘에서 큰 죄를 짓고 이 땅으로 쫓겨온 죄인들이다. ‘잃어버린 자’라는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죄인인 우리를 ‘쫓겨난 자’로 칭하지 않으시고 ‘잃어버린 자’라 표현하셨다. ‘잃어버리다’라는 말은 단순히 그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 한 마디 속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애정과 그리움이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을 다시 찾고자 하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하늘에서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 천국으로 다시 인도하시기 위해 2천 년 전 예수님은 죄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뿐 아니라 이 시대에 성경의 예언을 따라 등장하신 성령과 신부가 지금도 하늘의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계신다.


잃어버린 물건을 우연히 다시 찾게 된다면 그것만큼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대상인가에 따라 그 기쁨의 크기는 다를 것이다. 잃어버린 한 명의 자녀를 찾았을 때 하나님은 얼마만큼의 기쁨을 느끼실까. 그것은 성경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누가복음 15:11~32).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허비했던 아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그의 모습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종들에게 말한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2015년 4월 7일 화요일

봄꽃 목련



목련이 너무나 이쁘게 피었습니다 ^^
정말 정말 이뻐요
목련꽃잎으로 풍선이 불려진다는 사실을 아시나 모르겠네요